정치 및 사회

경제사상가로서 본 삼성의 전 회장 고 이건희(님)에 대한 평설

leejw162 2025. 6. 2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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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경제사상가로서의 기업가—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얼굴을 그리다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삼성 임원 200여명을 모아놓고 '신경영 선언'을 발표하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사진제공= 삼성 출처 : 오피니언뉴스(http://www.opinionnews.co.kr) - TV 모니터가 불쌍할 정도로 낯설다. 당시의 방송을 들어보면 이건희(님)의 화법에는 문제가 많았다. 상대가 모두 자기가 돈을 주면서 고용한 사원에 불과하지만 객인(客人)에 대한 존대어가 절대 부족하고 하대(下代)하는 형식에 스스로 아차하는 순간 당할 수 있는 패가(敗家)의 무덤을 파는 행위를 하기도 하긴 했다. 이유는 삼성의 임직원보다는 비임직원인 시청자가 훨씬 더 어마무시하게 상상이상의 계산불가로 엄청나게 극도로 더 많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는 완전 정복자도 무조건 이상으로 면밀히 조심해야 하는 형태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내용을 많이 아는 장애인'처럼 말했다. 이는 스스로 자멸할 수 있는 기회를 만인의 적에게 공개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자기가 큰돈을 내고 크게 선전하는 비전략가로 자해(自害)의 최악의 형태의 길이다.

 

<한국인들의 대부분의 의식을 지배하는 동북아의 반도의 국소적 마인드에 의하여 절대다수의 분들이 옛(故) 이건희(님) 같은 재벌들을 정신적으로는 서서히 몰락하길 바라면서 멸시를 하고 있다. 하나 이는 결국 엄청나게 잘못된 사고이며 국가패망의 첩경으로 가는 길목이다. 매우 간단히 말하면 한때 대구의 거상이며 거부였던 본인의 조부님에 비하면 그분은 엄청난 실적을 올린 동북아의 자존심이며 경제사상가로서 대한민국 자체를 크게 질과 양으로 업그레이드해 준 분이다. 이에 만인들이 그분의 실체에 대하여 시기(猜忌)하면서 경원(敬遠)으로 멀리 하더라도 나 같은 도덕철학도는 보다 그 내실을 정확히 보고 남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나의 조부님에 대한 스토리는 본 블로그의 首長 '고희단상'에 나름 자세히 실려 있다. 조부님의 친자식들이 지적으로 빈곤하여 大富를 보고도 모조리 패망하였고, 그 사업전수가 친손자들에게도 전혀 전달이 안 되어 본 블로거도 성장과정에서 중첩의 치명적 상처를 내내 받아 손실이 아직도 여전하다. 나의 조부님처럼 아무리 큰 財物家도 포석을 잘못하면 수년 안에 바로 망함을 나의 실례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하여튼 실제적인 칸트(Kant,1724~1804)를 멘토로 삼는 도덕철학자답게 '경제사상가로서 본 삼성의 전 회장 옛 이건희(님)에 대한 평설'을 탑재하오니 필요한 분들은 보셨으면 한다.>

옛(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대개 ‘세계 1등 기업 삼성의 수장’, ‘재벌의 총수’, 또는 ‘경영 혁신의 대명사’라는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건희를 단지 성공한 기업가로만 규정짓는 것은 그의 영향력을 좁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를 보다 깊이 바라보면, 그는 한국 경제의 구조를 근본에서 바꾸려 했던 사상가적 기업가, 다시 말해 실천하는 경제사상가였다. 그는 말보다 결과로 말했고, 철학보다 전략으로, 이상보다 실행으로 그 사상을 입증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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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자본주의에서 기술 자본주의로의 이행

이건희는 한국 경제가 박정희 시대 이후 구축해 온 개발국가형 산업 자본주의의 구조적 피로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1980~90년대까지 한국 경제는 수출주도형 대량 생산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규모와 속도에 중점을 두는 양적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제품은 많지만 품질은 낮고, 기업은 크지만 경쟁력은 약한 한국 산업계의 현실을 직시한 그는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급진적 메시지를 선언했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은 단지 경영 방식의 변화가 아닌,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재구성하려는 선언이었다.

그는 물질 중심, 생산 중심의 고도성장 논리에서 탈피해, 기술 중심, 인재 중심, 질 중심의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제시했다. 이는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실천이며, 지식자본과 혁신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새로운 경제질서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었다. 이건희는 한국 경제가 단지 외형의 성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어떻게 지속 가능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사상가였다.

기업은 사유의 공간이다

이건희의 삼성은 단지 이윤을 추구하는 생산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자 사상 실천의 장이었다. 그는 언제나 기업의 목적을 이윤 극대화에만 두지 않았다. 그는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위기 감수성, 질적 혁신, 미래지향적 사고를 강조했다. 이러한 철학은 단순히 경영 전략이 아닌, 시장과 인간, 기술과 사회에 대한 그의 본질적 사유의 결과였다.

경제사상사적으로 보면 그는 고전경제학이나 신자유주의의 궤도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는 자유시장만능주의를 신봉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국가주의적 보호체계에 기대지도 않았다. 그는 시장의 경쟁원리를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를 기업 내부의 창조적 통제와 전략으로 극복하려 했다. 이는 자유주의와 국가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한, 실용적 경제사상가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기술과 인간의 통합, 자본주의의 진화

이건희는 단순한 기술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기술을 다루는 인간, 즉 인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기술은 사 올 수 있지만, 인재는 키워야 한다”는 그의 말은, 경제성장과 자본주의의 핵심이 결국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신뢰와 투자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는 슐츠와 베커의 인적자본론과 맥을 같이하며, 자본주의의 인간화라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접근이었다.

그가 창조한 삼성의 구조는 거대 기업이지만 관료주의를 경계하고,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삼으면서도 끊임없이 내부 혁신을 추구하는 이중 구조였다. 자본주의가 내부에서 스스로 쇠퇴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삼성은 경제사상사의 한 사례적 텍스트가 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건희라는 철학적 기업가, 혹은 기업가적 철학자가 존재했다.

그림자와 유산

물론 이건희의 경제사상에는 분명한 한계와 그림자도 존재한다. 기업 지배구조의 불투명성, 재벌 세습 문제, 경제력 집중에 따른 사회 양극화는 그가 남긴 유산의 어두운 면이다. 이는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한 공정성과 신뢰의 시장 질서와는 상충하는 지점이다. 그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열었지만, 동시에 구조적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시스템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다.

결론

이건희는 경제사상사에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책상 위에서 사상을 말하지 않았고, 저술이나 강의로 철학을 펼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경영 결정과 전략은 사상의 결실이었다. 그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사상의 실행자였고, 한국 자본주의의 지형을 재편한 현장 중심의 사상가였다.

고 이건희는 우리에게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기업은 어떤 사유의 공간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혁신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시스템의 문제임을 묻고 있다. 경제사상가로서 이건희는, 바로 그 질문을 던지고, 실천으로 답변한 한국 자본주의사의 위대한 장(章)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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