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의 Money & Philosophy: 돈이 묻고, 철학이 대답하다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적 생명은 돈이다. 돈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소득의 일정 자전 궤도를 도는 절대 부유층이라면 몰라도 공무원 봉급이나 회사원의 월급, 혹은 노동시장의 임금, 자영업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보통 서민들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다음의 논설은 바로 보통 서민들을 위한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글이다. 본인이 절대 부유층이 아니라면 다음 글을 참조할 만하다. 프러시아 왕국의 쾨니히스베르크 독일의 철학자 Kant(1724.04.22.~1804.02.12.)는 돈이야 말로 인간을 가장 행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도덕윤리학 시간에 자주 설파했다. 심지어 아름다운 신부보다 지참금이 많은 신부를 자기 부인으로 모시고 평생 잘 대우해 주는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의 제 1조건이라고 하였다. 정말 솔직한 철인(哲人)이다. 우린 이런 철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100에 99는 이런 경지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통 서민들을 위한 도덕논설을 게재하오니 필요한 분은 참조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다 알듯이 절대 부유한 자들이라도 삶의 비극은 다 있는 법이다. 그리하여 돈이 안 되면 근검절약하면서 정신이라도 승리하자는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우리의 삶은 ‘가치’와 ‘가격’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커피 한 잔의 가격, 내 노동의 가치, 내가 사는 집의 가격과 내 삶의 질. 이 모든 것이 숫자와 경제적 지표로 환산된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가시적 교환’을 삶의 중심에 둔 체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돈이 있다.
하지만 철학은 묻는다. "그 숫자들은 진짜 우리 삶을 설명하고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단순한 교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존재 가치까지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직업의 명예는 연봉과 연결되고, 사회적 성공은 자산의 크기로 측정된다. 교육조차 '투자'로 환산되며, 인간관계도 때때로 효용의 논리 속에서 유지된다. 우리는 어느새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전부다”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철학은 바로 그 익숙한 끄덕임을 의심한다. 철학은 무언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힘’이며, 자본주의의 필연처럼 여겨지는 질서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팔아왔는가? 우리는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는 않았는가? 과연 돈은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를 주는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속박인가?
영국과 미국 등의 서구의 철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 금욕적 청교도 윤리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했다. 원래 돈은 노동의 신성함, 절제, 자기관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돈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고, 노동은 자기 실현의 수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의무로 변해갔다. 철학은 그 전환의 지점을 주목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되었는가?
자본주의는 분명 많은 것을 가능하게 했다. 기술, 산업, 생활의 편리함. 그러나 그 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이다. 철학은 그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한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가? 왜 끝없는 경쟁 속에 머물러 있는가? 왜 우리는 ‘충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철학은 돈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은 돈의 힘을 인정한 뒤, 그 힘을 어디에 쓸 것인지 묻는다. 많은 철인(哲人)들은 “부유하되 도를 잃지 말고, 가난하되 의를 잃지 말라”고 했다. 철학은 자본주의적 성공 너머의 삶을 묻는다. 그것은 소유보다 존재의 문제이며, 경쟁보다 의미의 문제다. 더우기 죽음 앞에는 만인이 똑 같다는 말이다.
돈은 ‘무엇을 가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주지만,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을 제기한다. 이 두 질문이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돈이 묻고, 철학이 대답할 때, 그 대화 속에서 우리는 나의 바른 길을 찾을 수 있다.
(다음 기회엔 절대부유층을 위한 돈의 철학에 대하여 논하고 싶지만 국제금융유대가문 로스차일드가 아닌 이상은 그가 주식재벌 워런 버핏(Warren Edward Buffett,1930.08.30.~)이라도 순간적으로 제로(Zero)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대인 집안은 오스트리아 철강업의 재벌급의 부유층이었으나 히틀러 총독 때문에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해 몸만 빠져 나와 부(富,Wealth)가 한 방에 이슬처럼 사라졌습니다. 학설을 이룬 대학자인 경우는 다소 예외로 다르지만 아무리 큰 부유층이라도 돈이 떨어지면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더군요. 이는 우리의 역사가 수시로 증명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돈은 정치권력처럼 그 자리에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돈의 철학'입니다. 참고로 본인의 조부님이 대구에서 巨商으로 巨富이었지만 부가 전수가 전혀 안 되어 나와는 완전 무관합니다. 오히려 소년시절에 고생만 골라 생으로 했습니다. 또 예를 들면 교사로 있을 때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성과급의 순위로 서로 다툴 때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 황당하고 답답하여 조상님 보기가 창피했습니다. 학부모들도 돈에는 악질들이 많습니다. 돈을 보는 눈도 표적에 따라 크게 3~4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上級, 中上, 中下, 下級으로 분리해서 봐야 돈에 대한 방향타 정답이 바로 나옵니다. 하여튼 위의 글은 나의 전공인 학생 대상인 도덕교과서의 수준으로 한 번 다루었으므로 그냥 참조만 하면 됩니다. 일종의 中下를 다룬 무명씨(無名氏)의 대필(代筆)로 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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