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주: 본 글의 연원은 COVID 19 후로 사회풍습이 여기저기 많이 변모되었습니다. 무빈소장례도 많이 생기고, 심지어 제사를 중단한 가정도 제법 됩니다. 장례도 그렇고 특히 제사는 그동안 장남이나 맏며느리님들이 고생과 수고를 독박으로 많이 했는데 돈도 들고 힘들어 고생하다가 하기 싫은 차에 잘 됐다 하고 그만둔 건지 당황스럽습니다. 이를 문화보다는 현시적 문명적 변곡점으로 한번 다루어 보았습니다. 졸견이지만 혹여 필요한 분은 참조부탁합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창가에 앉아 오래된 습관 하나를 떠올린다.
젊은 시절에는 이유도 없이 걷곤 했다. 목적도 없이 골목을 지나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발을 옮기던 그 시절. 지금의 나는 여전히 같은 도시 안에 살고 있으되, 더 이상 그렇게 걷지 않는다. 몸은 남아 있으나, 그때의 나는 이미 사라진 듯하다.
나는 이 미묘한 상실을, 문득 ‘행동의 죽음’이라 부르게 된다.
자연을 보면, 한 종이 멸종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갑작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먼저 그들이 살아가던 방식이 사라진다.
사냥하던 법을 잊고, 길을 찾던 감각을 잃고, 서로를 부르던 소리를 잃는다.
범고래는 바다의 포식자이면서 동시에 기억의 동물이다.
그들은 단순히 먹이를 쫓지 않는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사냥의 방식, 물결을 읽는 법, 협력의 리듬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전승이 끊기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답게’ 살지 못한다. 먹이를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잡는 법 자체가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깨닫는다.
죽음은 마지막에 오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과정이라는 것을.
하늘을 나는 새들도 그러하다.
철새는 길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길을 배워온 존재다.
앞서 날던 한 마리, 그 뒤를 따르던 수많은 날갯짓.
그 질서가 끊어지는 순간, 하늘은 더 이상 길이 아니다.



길을 잃는 것은 단순한 방향의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관계 맺던 방식이 끊어지는 일이다.
나는 다시 내 주변 인간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여전히 말하고, 먹고, 일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행동들은, 이미 조용히 사라졌다.
누군가는 더 이상 깊이 사유하지 않고,
누군가는 더 이상 타인을 오래 기다리지 않으며,
누군가는 더 이상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잊는다.
그 순간, 우리는 죽지 않았지만
이미 어떤 ‘인간의 방식’ 하나를 잃어버린다.
생각해 보면, 존재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비로소 우리가 된다.
사유하는 인간, 사랑하는 인간, 기다리는 인간—
이 모든 것은 ‘행동’ 위에 세워진 이름들이다.
그러므로 행동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름만 남는다.
나는 창가에서 일어나, 천천히 맘속으로 밖으로 나가본다.
목적 없는 걸음을 다시 정신적으로 시작해 본다.
이것이 무슨 거창한 의미를 되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다.
행동은, 되살릴 수 있는 마지막 생명이라는 것.
어쩌면 우리는 모두 완전히 죽기 전에
먼저 조금씩 사라져 가는 존재들 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끝까지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느냐’ 일 것이다.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비록 숨은 이어질지라도 그 삶은 이미 조용히 막을 내린 것이다.
존재는 '행위'로 완성되며 이어진다.
이어지는 나의 삶도 존재론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철학 및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1C 대한민국의 미래를 투시한 현대자동차그룹의 새만금 대규모 투자를 상념(想念)하는 어느 철학자의 수필 탑재 (14) | 2026.03.03 |
|---|---|
| 한 철학자의 노트 — AI 시대의 민생(民生)을 생각하며 (2) | 2026.03.03 |
| 생체 호르몬의 비밀을 설명해 봅니다. (8) | 2026.02.27 |
| 이븐 루시드의 생애와 사상 및 주요 철학적 관점 (8) | 2026.02.25 |
| 철학 자체 vs 철학 교육 (8) | 2026.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