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뇌 과학

사라진 우주(국내·외 저명인사) 시리즈(2): 나의 철학 은사 변규용 교수(님)

leejw162 2025. 5. 3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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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교원대대학원 철학 은사 변규용 교수(님)

변규용 교수(님)

 

필로칼리아(Philokalia,영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체득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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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을 국내저명인사 가운데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글로벌 학자로 학문적인 영성, 필로칼리아를 체득한 분이었다. 필로칼리아는 동방정교의 최고급의 영성적 수준으로 지식이나 지혜의 단계를 초월한 영성적 영혼의 단계에 이른 분에 대한 칭호이다. 하느님의 영혼에 이른 분에 대한 존칭으로 수도자의 최고 단계에 기도와 묵념으로 조용히 홀로 오른 분이란 뜻이다.)

변규용(바오로) 전 서강대학교 교수가 2023년 10월 22일 선종했다. 향년 89세. 장례는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렀다. 장지는 서울대교구 용인공원묘원.1934년 함경북도 신갈파진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3년 파리가톨릭대학에서 우리나라 평신도로는 처음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교철학자로 1970년에는 툴르즈대학에서 철학박사, 1980년에는 파리10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1984년 대구 계명대 철학과 교수, 1984~1985년 서강대 철학과 교수, 1985~1997년 한국교원대 교수, 1997~1999년 서강대 국제대학원 국제관계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1984년 프랑스 아카데미 학술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51~1952년 학도의용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대통령 표창 및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출처: 가톨릭 신문 발행일 2023-11-05 제 3366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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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의 교수님은 '세계 모든 지성인의 고국'이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 그리고 문학을 박사까지 딴 분이다.

아울러 제가 교원대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수학할 적에 직접 수업을 해 주신 은사님이다.

당시에도 수업분위기에 다른 분에게선 볼 수 없었던 철학 및 신학적 심연의 영성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위기는 꽤 자유스럽고 동서융합의 어려운 주제수업이었지만 쉽게 잘 풀어주어 프랑스 대학의 유럽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실수로 대학을 잘못 오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원대의 경우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있지만 철학같은 심연의 학문을 공부하는 하얀 상아탑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

그냥 초·중등교사자격전문양성대학에 불과하여, 실용목적을 초월하는 인간존재지향의 참(眞,Truth)인 진짜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학교에 필로칼리아틱한 교수님이 계신다는 것은 분명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강의마다 따로의 변환기가 필요하다. 말씀은 하지 않았겠지만 얼마나 지적으로 피로했을까. 계산이 되고도 남는다.

내가 석사 졸업 후에 들어보니, 그분이 서강대로 가셨다는 말씀을 듣고는 대학다운 대학에 가셨다는 다행감이 들었다.

저희들을 위하여 교수아파트로 우릴 불러서 맥주 등으로 격려를 해 주셨는데 그때 사모님도 늦게 오셨다.

사모님께서는 저희들의 인사만 받고 잠시 후 서재로 가셨지만 공부하는 우리들을 격려해 주셨다. 아파트의 평수는 18평 정도.

사모님께서도 대학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대학교수로 계셨는데 나의 동기들이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올렸다.

사모님이기 이전에 교수님이라고 하여야 바른 예의였는데 나의 동기들의 생각이 순간적이나마 너무 짧았다.

나의 동기들도 남들이 들으면 부러워하는 서울대, 연세대 등 굴지의 대학출신들인데도 말이다.

난 이 일로 우리 한국 중급 지식인들의 기초적 지력에 원초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교수님은 제가 생각하는 한 필로칼리아를 진정으로 체득하신 극소수의 한국교수님이라고 본다.

그때도 동방정교에 대한 강의를 깊이 있게 핵심적으로 해 주었다.

그네들의 영성은 가히 합천 해인사의 깨달음 면장과는 또 달랐다.

바로 신과 자기 영혼에 대한 끝없는 기도와 낭독적 주문, 그리고 가없는 침묵 그 자체.

연구실의 교수님의 의자는 딱딱한 통나무걸상이었다.

소수그룹 강의 때는 학생들은 폭신한 소파형 의자에 앉고 교수님이 딱딱한 통나무걸상에 앉아 수업을 해 주었다.

실력이 변변하여 답변이 시원찮아도 우릴 보고 장차의 철학교육의 달인이라고 칭송을 간간이 자주 해 주었다.

 

이분의 강의내용을 분별해보면 단박무심의 경지로 다른 학설을 별로 말하지 않았다.

교수와 학생, 강의실이 대자연처럼 혼연이 된 자연적 흐름의 수업이었다.

철학과 신학과 문학이 차례로 동시에 등장하는 일체적 구성의 입체적 3면의 수업이었다.

자신의 것을 바로 꾸밈없이 즉설로 종합하여, 세 가지 색갈이 함께 다면으로 연동하면서도 매우 쉬운 말의 수업이었다.

그래도 배우는 학생들을 위하여 철학적 이론을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철학사적인 내용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직지심경의 일종의 선불교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빌려서 절차를 매기는 교학적 말씀이 아니었다.

그래서 단체로 노래 부르면서 신을 찬미하는 로마의 가톨릭를 따르면서도, 개인적 기도의 침묵의 영성인 그리스 동방정교에 더 큰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인 내가 구하는 그 모든 것은 다 우리인 나의 내심의 영혼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침묵의 기도로 영성적인 경지에 이르면 나와 남을 위한 자유와 진리, 정의를 바로 그대로 다 쉽게 내가 직접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지금 그 자리에서 모두가 다 함께 같이 그 모두를 다 신의 말씀과 함께 느끼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다소 난해한 교과서적인 필로소피보다는 즉자적 심연의 필로칼리아적인 수업이었다.

듣고만 있어도 평이하게 흐르는 대하의 강물과 같았다. 그 수업은 이미 토론을 넘어선 조용하고도 숙의적인 수업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어렵게 번역되어 유통하는 유럽철학용어를 원래의 쉬운 일상언어 그대로 꾸밈없이 전달하여 말씀하였다.

누구나 아는 너무나 쉬운 언어로 전달하여 강단 철학의 고질병인 난해성을 흩어지게 하였다.

다소 난해한 지식의 용어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명료하게 이해하게 하는 수업이었다.

그러면서도 해설서보다는 원본을 그대로 순서에 맞게 차곡차곡 우리말로 동화처럼 쉽게 전달해 주었다.

철학이나 신학, 문학 등의 인문학은 개별 지식(Soul)을 국한으로 다루는 것(Knowledge)을 바탕으로 전반적인 지성(Spirit)를 단순한 사고인 이해(Understanding)로 느끼게 하는 검증의 인간존재역사 그 자체인 학(Classics)임을 말씀하였다. 개인의 영혼적 정신실재인 Soul로 인간존재의 타당한 Spirit를 머리와 가슴으로 함께 이해하는 Understanding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의 난독으로 난해해 보이는 사변철학도 무공비급(無跫秘笈)인 것이 아니라, 쉽고도 쉬운 저자거리의 시장의 거래 용어로 변환하여 말씀하였다. 그리고 학문이란 머리로 생각하는 simple mind로 개별적 상대의 절대성과 보편적 절대의 상대성을 놓치지 않는 수업이었다. 복잡한 미로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아니라 즉결즉시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이었다. 미시(微視)와 거시(巨視)를 단순어로 쉽게 들어서 삼키는 블랙홀이었다. 강의실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알기 쉬운 말이지만 논조적(論調的)으로 인간적 사유에 있어서의 물리적인 시공의 동일성 넘어, 원초(substance) 이전의 비모순율까지 직시하는 양자역학을 느끼게 하는 고난도의 극하고 험한 경지의 수업이었다. 그런데 그 진행수업이 누구나 이해하게 하는 신의 소리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분이라도 교사양성의 교원대 같은 자격전문 목적대학에만 계속 근무한다면 그가 바라는 급의 후계자는 만날 수가 영영 없을 것이다. 이미 절대다수의 재학생들의 몸과 마음과 정신이 Kant급의 지순(至純)한 학문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처한 당장(當場)의 계급과 개인적 신분의 형편으로 생계유지인 취업에 우선적 뜻이 있으므로, 교양처럼 보이는 정신고양의 인문학은 듣고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그가 처한 신분적 계급을 떠나, 먹고 살기 위해 개인적으로 오래 종사(從事)하다 보면 비법으로 알게 되어 돈과 직결되는 기술적 전문직인 아닌, 범부(凡夫)에게는 완전 별외(別外)로 보이는 인간적 존재를 실증이해로 다루는 인문적 공부는 인간 사유의 귀족만의 계급적 영역으로 종두득두(種豆得豆)인 범부적 신분과 계급으로는 진짜 넘기가 힘든 장벽(障壁)이 산맥(山脈)으로 길게 높이 험준하게 설산(雪山)의 깊은 계곡과 빙벽(氷壁)으로 모진 삭풍(朔風)의 회오리와 함께 난무하는 어두운 흑구름과 하울링의 사방의 괴성으로 무너져 내리는 땅과 함께 사태(沙汰)로 어울져 끝도 없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를 떠날 때는 이런 분도 아마도 혼자 떠날 것이다. 강의실에서 설사 말이 통해 같아 보여도 급이 다르면 보고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름의 스스로 만족할만한 일정 이상의 학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묵고(黙考)의 수행을 할 수 있는 유전적인 정신적인 여력과 개인적인 처지의 경제력이 시간과 함께 충분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상처만 가득히 안고, 그냥 빈손으로 그림자와 함께 힘겁게 슬슬히 스잔하게 멸(滅)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에 반작용이 없는 작용의 공짜는 없는 법이다. 교수도 학생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여전(如前)히 백년하청(百年河淸)일 뿐이다. 학생들이 2류이면 교수도 2류가 되는 것이다. 교수들의 세계도 위계(位階)의 급(級)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질서로 촘촘히 짜있는 법이다. 협력 마력이 부족하여 추월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혼자 발버둥쳐 보다가 낙담하여 소리 없이 포기한 교수 분들도 몇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석학(碩學)이 근무할 곳은 전혀 아니다. 그래도 졸업과 동시에 교사(teacher)로 통하는 국비운영의 한국교원대학은 자격전문 목적대학 안에서는 대한민국 최고급으로 영롱한 녹색의 푸른 상아탑이다. 졸업과 동시에 프랑스의 사통팔달의 전천후(全天候) 귀족 교수(professor)로 불리는 프랑스 파리(Paris)의 고등사범과 같은 과(科)의 류(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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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정년 후 김홍근 성천문화재단 주간과 대담으로 인터뷰하는 변규용 교수님(성천문화재단 제공)

 

<첫눈이 오는 날 광주군 태화산 기슭에 있는 변규용 교수의 서재를 찾았다. 기둥이 없는 움집 같은 단순한 형태로, 천장이 높은 목조가옥의 넓은 거실에는 말러의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벽난로에는 장작이 빨간 불빛을 내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변규용 교수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뚤루즈대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빠리 가톨릭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빠리 제10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빠리 제10대학 촉탁교수, 동경대 객원교수를 거쳐 계명대, 교원대 교수를 지냈고, 서강대 국제대학원에서 최근 정년을 맞았다. (대담 김홍근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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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이곳 곤지암의 산골에 암자를 짓고 들어오시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정년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평생을 읽고 모은 많은 책을 둘 곳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집을 짓고, '동서영성연구소'라고 이름을 붙였지요. 저의 오랜 학문적 여정의 종착점으로 다다른 것은 동서양의 내면적 영성의 문제입니다. 세계적인 영성의 보고 중 하나는 동방정교회의 전통인데 지금 한국에선 그 분야가 전혀 미개척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10년 간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보았고 그 결과, 이 땅에 꼭 소개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번에 루마니아를 방문하셨던 것입니까?

 

저는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그곳의 수도원 등에서 3개월을 지내면서 영성의 현장을 들러보고 지난달에 돌아왔습니다. 제가 특히 관심을 두고 보았던 것은 우리에겐 매우 생소한 동방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그 정신적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 해답은 바로 '필로칼리아'였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인 영어 필로소피의 어원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희랍어 '필로소피아'인 것처럼, 필로칼리아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의 희랍어로서 동방교회의 영성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영성이란 것은 연구의 대상이기 전에 실천을 통해 체득해야 하는 것이어서, 저는 이번 여행에서 산 속에 있는 수도원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필로칼리아의 진면목을 느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배운 것은 필로칼리아란 다름 아닌 기도생활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동방정교회가 간직해온 최고의 가치는 바로 기도생활의 전통입니다. 이론적, 실천적으로 기도생활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 필로칼리아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을 동서영성연구소라고 했군요. 연구소라면 외부인에게도 개방하신다는 뜻입니까?

 

저는 평생 학문의 길을 걸어오면서 여러 스승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이제 나도 그동안의 학은學恩을 갚을 때가 되었다고 느껴져서, 그동안 모아온 동서양의 많은 전적들을 여기다 모아놓고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연구자들이 여기서 지내면서 논문을 쓸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하면서 뒷받침하려고 합니다. 파스칼의 철학, 폴 리쾨르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 도가철학, 기독교와 타종교의 비교연구 등의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왠만한 책은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유럽에서 논문을 쓸 때 여러 분들이 내게 이런 식으로 베풀어주어서 큰 도움이 되었는데, 이제 나도 미약하나마 이렇게 후학들을 돕고 싶은 것입니다. 성천문화재단에서 하고 있는 것 같은 일반인들을 위한 고전교육도 내가 오래 전부터 시인 구상선생님하고 함께 상의해오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류달영 선생님께서 재단을 세우고 동서인문고전강좌를 개설하자 기꺼이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필로칼리아에 관심을 가지게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저는 연세대 경제과를 졸업하면서 경제학을 졸업해버렸어요. 그 대신 철학과 종교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먼저 가톨릭으로 입교를 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을 포괄한 기독교를 연구하기 시작했지요.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귀국하던 무렵에 동방정교회 관계자들을 알게 되어 그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동방정교회를 공부해왔습니다. 그 결과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기독교는 지극히 부분적인 것으로 전체의 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 나머지 반은 동방정교회가 간직하고 있고, 그 동방정교회는 특히 기도와 영성의 전통이 강한데 그 핵심이 필로칼리아라는 것이지요. 귀국 후 국민의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라고 하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동방정교회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종의 사명감으로 동방정교회를 연구하고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동유럽국가들 중 특히 루마니아와는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제가 루마니아에 관심을 가지게된 것은 1964년경 제가 빠리에 유학 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난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신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저는 학도의용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었는데, 그 책을 보니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빠리에 가자마자 나를 가장 감동시킨 소설의 저자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저는 그를 만나고서 대뜸, "당신은 나의 소설 제목을 훔쳐간 사람이다"고 인사하였습니다. 내가 동족상잔의 부조리한 비극의 와중에서 겪은 체험을 이야기하자, 루마니아 출신인 그는 자신도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서 나를 얼싸안아 주었습니다. 아마 한국인으로서는 제가 그분을 만난 최초의 사람일 겁니다. 그 인연으로 그분은 내가 결혼할 때 대부 겸 증인을 서주시고, 그 후 한국도 여러 번 방문하게 됩니다.

 

이번에 방문하셨을 때는 누구의 초청을 받고 가셨습니까?

 

저는 빠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의 올리비에 클레몽 교수를 통해 그 문하에서 공부하던 루마니아 출신의 포프 수도사를 알게되었는데, 이번에 그가 루마니아 정교회 대주교로 부임하면서 저를 초청했습니다. 저는 영성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와 자주 토론했는데, 대화 중에 그가 살던 수도원에 대해 여러 번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꼭 가고 싶었고, 그 소원을 이번에 푼 것입니다.

 

루마니아 수도원 생활을 소개해 주십시오.

 

루마니아 산골에 있는 그 수도원에 갔더니, 역사상 처음으로 방문하는 한국인이라며 모두들 놀라며 반겨주었어요. 가보니 수도원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침묵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깊은 산 속 작은 암자에서 수행하는 선승禪僧들을 보는 것 같다고 하면 글쎄 비교가 될까요? 적어도 겉으로 보는 물리적인 면에선 그들이 훨씬 더 악조건 속에서 고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침 3시면 일어나서 8시까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루에 두 끼를 먹고, 채식만 하고, 하루에 열시간 이상을 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은 노동을 합니다. 잠은 토막잠으로 조금밖에 자지 않는 것 같아요. 옷은 한 벌, 청빈하고 고행하며 단순한 삶을 살지요. 어쨌든 그들을 보면 얼굴이 투명하기 그지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지, 숨겨져 있는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면 금방 알고, 손으로 만져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성이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고 해서 뜬구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영성생활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물질주의적(materialistic)인 것입니다. 제가 성철 스님을 두 번 만나보았는데, 그런 분하고는 얼굴을 대면하면 그걸로 족하지 무슨 거창한 말이 필요하나요? 그분이 뭐 철학자나, 불교학자는 아니지 않아요? 눈빛이나 미소 하나가 벌써 마음을 울리는 데 긴 말이 뭐 필요하겠어요? 언어 이전의 현존 자체로서 서로 마음의 대화가 통하는 것이지요. 이번에 루마니아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똑같은 일과를 수행했습니다. 그 와중에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가부좌는 아니지만 가만히 앉아 꼼짝 않고 있는 그들을 보면 순박하고 가난한 영혼이 그대로 다 드러납니다. 그곳에선 신학자라고 하면 신학박사나 대학교수 혹은 수도원장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기도생활에 깊이 들어가면 그 영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주위에서도 저절로 알게되지요. 그런 사람이 바로 신학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존경받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기도로 그들은 가장 간단한 기도문을 택하는데, 예를 들어 묵주를 들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혹은 "그리스도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소서"라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를 밤낮으로 외웁니다. 이것이 필로칼리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6년 전에 희랍의 아토스산에 간 기억이 나는군요. 그곳은 수도원공화국으로 들어갈 때 따로 비자가 필요한 곳입니다. 약 천년 된 오래된 수도원이지요. 그때도 굉장히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사들과 똑 같이 먹고 일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곳에서 만난 어느 수도사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데, 그 눈이 투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분은 불어를 잘 했는데, 내가 말을 걸면 대답만 할 뿐 자기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습니다. 평생 침묵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에게서 선물 받은, 손수 만들어 저에게 준 이 묵주를 저는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로칼리아 전서는 교부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모은 것으로서, 저 이집트의 초기 은수자들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도생활의 체험담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저도 두 달간은 침묵 속에서 지내고 한 달간은 루마니아 말도 배우고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제 귀국 후 저에게 남은 과제는 그 필로칼리아를 내가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제 화제를 돌려서 선생님의 초발심 시절로 돌아갈까요? 경제학을 하다가 무슨 계기로 철학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까?

 

경제학을 공부한 것은 한국전쟁의 와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대학에 들어갈 때, '밥을 보장할 수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죠.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환도하여 졸업할 때가 되자, 하루 세 끼 밥 때문에 내가 경제학을 공부해야된다고 생각하니 아찔하더군요. 그때 철학과 신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을 하게된 동기는, 문리대 철학과에 다니던 친구를 따라 박종홍 선생의 강의를 듣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것이죠. 박선생님께 찾아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하니까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 찾아오라고 해요. 그런데 졸업할 때, 지금의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의 경제조정국에 추천 받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날이 그대로 경제학과 영영 헤어지는 날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은사님께 죄송하기 짝이 없었지요. 그렇게 되니 먹고살 길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3년 간을 저널리스트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곧 가톨릭에 입교를 하여 삶과 학문의 변화를 소신 있게 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 드디어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하여 열암 박종홍 선생의 제자가 되고 2년 후 프랑스로 떠나게 됩니다.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간 이유는 자기를 발견하는 학문으로서 철학이 나에게 빛을 주었기 때문이고, 나아가 나를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한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특히 대학원을 다닐 때 중국인 오경웅 박사의 자서전인 <Beyond the East and the West>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때 나의 또 다른 은사였던 김익진 선생을 도와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게 되죠. 그때 박종홍, 차주환, 이기영 선생님 등 당대의 대가들이 어려운 부분을 감수해 주셔서 거의 완벽한 번역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제목도 <동서의 피안>으로 번역했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날 그 책이 출판되었는데, 저는 그 책을 화두로 삼고 장도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앞 세대의 유산이 그 한 권에 결집되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던 것이죠.

 

프랑스에서는 제일 먼저 철학을 공부하셨죠?

 

저는 학위를 목표로 유럽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석사 학위로 박사과정에 바로 등록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학부과정 1학년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일반 학생들은 고교 때부터 라틴어와 희랍어를 다 배우고 들어왔어요. 라틴어는 한국에서 서울대 대학원에 들어갈 때 제2외국어로 시험 치기 위해 공부했었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희랍어는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래 불어 공부하랴, 희랍어 공부하랴 정말 정신이 없었지요. 그때 프랑스 남부 뚤루즈에서 대학년 초급 과정을 보낸 3년 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시험을 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한, 자존심이 가장 상했던 시절이었죠. 시험을 라틴어로 보는 게 더 편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일반대학에서 한문으로 시험 답안을 써내는 것과 마찬가지죠. 3년 만에 겨우 학사학위를 마쳤지만, 저의 긍지는 대단했습니다. 한자문화권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나는 일반 졸업생들보다 무한히 앞서 나가있다는 자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석사과정부터는 교수들이 인터뷰 후 나에게 강의를 생략해주었습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면서 논문을 써나갔던 것이죠.

 

석사학위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유학 가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서양의 쓰레기통을 뒤지러' 온 게 아니라, 그들에게 무언가 기여해야겠다는 대화자로서의 비전을 갖고 있었지요. 그때 벌써 나이 스물 여덟에 대학원을 나오고 국회 출입기자라는 저널리스트의 경험도 쌓은 후였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하면서 신학 공부도 병행하여, 스콜라 철학의 존재와 한자문화권의 도道를 비교하는 착상을 한 것이지요. 또한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문필가였던 자크 마르탱과 3년을 같이 살면서 그의 철학을 어떻게 한자문화권과 접목을 해볼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계시 밖에 있던 한자문화권에서도 신의 자연적 인식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맹자에서 발견해보려고 시도했죠. 그래서 논문 제목이 <맹자에 있어서의 자연과 초자연 - 신의 인식을 중심으로>였습니다.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다룬, 다분히 신학적인 주제의 첫 번째 석사학위 논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학박사학위 논문으로 발전하지요.

 

그럼, 철학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뚤루즈 대학 철학박사과정에서는 조르쥬 바스튀드 교수의 지도 하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희랍철학자들을 연구하면서 중세 기독교의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만으로는 유有와 무無를 아울러 극복하는 도와 비교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고 서양철학의 근원으로 돌아가 '로고스'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논문 제목이 <도와 로고스>가 되지요. 그러나 도와 로고스를 연결하는 고리를 잡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지도교수에게 상의했더니 "결론을 내려 하지말고 문제를 제기하라"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박사학위논문이 세 권으로 나오게 됩니다. 도에 관한 연구, 로고스에 관한 연구,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 이렇게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논문이 1970년에 나온 것입니다.

 

그 뒤엔 어떤 공부를 계속하셨습니까?

 

박사논문을 쓰면서 도덕경의 불어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발표 다음날부터 도덕경의 번역에 매달렸고 또 비교연구의 새 방법론도 모색하였습니다. 산스크리트 문법책을 독파한 것도 그때였지요. 일단 박사학위라는 의무를 마치고 나니까 진짜 공부가 하고 싶어져 빠리로 가서 고등연구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빠리 가톨릭 대학의 신학박사 과정에 등록하였지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경야독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아데가 캐나다에 있어서 그분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려고 캐나다로 가려고 했으나 그만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냥 빠리에 주저앉게 됩니다. 어쨌든 엘리아데도 루마니아 출신이어서 저는 루마니아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신학박사 논문은 내 석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써나갈 수 있었습니다. 철학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도교와 희랍철학과의 관계를 다루었고, 신학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유교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를 다루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철학과 종교를 엄격히 나누었지만, 동양에서는 그 구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유교가 철학입니까 종교입니까? 불교와 도교는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서양에서는 둘 사이의 구분이 뚜렷하기에 나는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제대로 비교하기 위하여 철학과 신학을 따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에서는 유대적 그리스도교의 부성父性의 문제와 원시 유교의 효孝의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래서 논문 제목이 <아버지와 아들>이 됩니다. 그때 저는 효도신학이라는 말을 만들어 '동서상봉을 전망하는 효도신학에 관한 연구'를 시도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효경>을 불어로 번역했습니다. 제가 쓴 두 논문이 곧 프랑스에서 출판될 것입니다. < 도와 로고스>의 서문은 석학인 폴 리쾨르 교수가 썼고, <아버지와 아들>은 올리비에 클레몽 교수가 썼습니다. 두 분의 서문이 들어가면 세계적인 공인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모님을 만난 것이 그때쯤이지요?

 

두 번째 학위인 신학박사논문을 발표한 날이 저의 약혼 날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의 은사님으로 예수회 신부로 서강대학 창설자의 한 분인 김택환 선생님이 빠리에 오셔서 제가 만나 뵈러 갔더니 프랑스로 공부하러온 대구 아가씨 3명이 함께 있더라구요. 그래 처음 만났는데, 나중에 빠리 대학 석사과정에 들어가는 집사람의 추천서를 내가 써주게 되었지요. 그때는 나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더니 결혼하니까 그냥 친구처럼 되더라구요. 나로서는 나이 마흔에 결혼을 했으니 상당히 만혼이었습니다. 인생의 지각생이었지만 저는 언제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영원한 시작에 도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문학박사학위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철학박사학위를 위한 논문과 신학박사학위를 위한 논문을 어떻게 종합할까 고민하다가 쓰게 된 것이 문학박사학위 논문이 됩니다. 1980년 빠리 제10대학에서 폴 리쾨르 교수의 지도 하에 도덕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도의 해석학>을 시도한 것이죠. 리쾨르 교수는 1913년 생인데 지금도 정정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대학자입니다.

 

프랑스 빠리대학에 계시다가 일본 동경대학으로 초청 받아 가신 얘기를 들려주십시오.

 

빠리대학 비교인류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연구실로 뉴스레터가 왔는데 보니까 프랑스 정부가 일본 동경대학에 교수를 파견하는데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기사가 났어요. 그때 여러 명의 교수들이 응모를 했는데 나도 원서를 넣었지요. 발표가 났는데, 철학분야에서 내가 선정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어요. 그래서 동경대학 인도철학과에 교환교수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과장은 유명한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교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동서문명의 비교에 관한 강의도 많이 했는데 이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학자가 여러 문화를 비교 연구할 때 주의할 점은 종합(synthesis)을 해야지, 혼합(syncretism)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종합은 비빔밥이지만, 혼합은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은 썩기 마련이지만, 비빔밥은 각 요소가 모여 승화됩니다. 따라서 자기 노선을 분명히 하고 다른 요소를 적절히 소화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의 장단점을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회원이 300여명에 이르는 '삼국유사학회'에 가보니 자기나라 책도 아닌 이웃나라의 책 한 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그 저력이 놀라왔습니다. 일본은 우리를 저렇게 깊게 연구하는데, 우리는 저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는 김소운 씨가 일본통이라고 하지만, 일본 국회도서관을 뒤져보니까 해방 후 한국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일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한 사람이 당시까지는 한 사람도 없었어요. 프랑스 정부의 파견 기간이 끝나자, 이번에는 동경대학에서 초청을 해서 결국 일본에 만 3년을 체류했습니다.

 

귀국하신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먼저 대구에 있는 계명대학교에 초대되어 갔습니다. 그 학교는 저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꺼번에 책을 사라고 3만 불을 주는 거에요. 저는 동서문화연구소장을 지내면서 세계적인 잡지를 원어로 냈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목요철학세미나를 열었지요. 일종의 교수 사이의 스터디 그룹으로 시작했는데,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몰려와서 결국 TV에서 생중계까지 하였지요. 300회가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그 세미나에서 강연을 한 번 해야 진짜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지요. 그 뒤에는 교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겨서 대학원장을 두 번 지냈습니다. 그리고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에 초청 받아 가서 비교문화론을 강의하면서 4년을 보내고 최근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오랜 학문적 역정 끝에 도달하신 마지막 화두가 곧 '영성'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한국인으로 외국에서 오래 사시고 또 논문들도 동서사상의 비교에 관해 많이 다루셨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영성과 서양의 영성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내 학문의 시발점에서 만나 지금까지 영향을 준 오경웅 박사를 생각해 봅니다. 그가 얘기했던 'Beyond the West and the East'의 문제를 집대성해보려고 저는 평생 노력해 왔습니다. 그럼 서양과 동양의 영성의 종합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넘어서는 것'으로 불교적인 용어를 빌면 피안에 도달하는 것인데, 제 생각에는 동양이나 서양으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속으로 내향內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면서 어딘가를 지향하는 세계를 넘어서서 내심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면 동東도 없고 서西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며 영성의 만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합을 위해서는 먼저 많이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순한 진리를 알기 위해 복잡한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화로 나아가야 하고 그 길이 곧 영성의 길입니다. 저는 그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까 덧붙여 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루마니아 영성의 대가들이 간단한 기도문을 외우면서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불교의 염불 문제가 생각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염불이란 지식이 없는 할머니들을 위한 낮은 수준의 방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 지식인들은 방대한 스케일의 화엄경 같은 경전을 공부하거나 직지인심 하는 선의 세계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공부법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교학이나 참선의 경지가 높아지면 서서히 언어의 한계를 자각하고 단순하고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경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뜰 앞의 잣나무' 같은 화두는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것이고, 더 나아가 의미가 퇴색되고 소리만 남는 주문이나 할(고함소리)까지 나오게 됩니다. 결국에는 침묵에 이르게 되겠지요. 동방정교회의 영성과 기도생활이란 것도 그런 과정과 무관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21세기 물질문명이 판을 치고 있지만 동양이나 서양이나 간에 영성의 전통은 비록 소수에게서 이지만 의연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대중들의 눈높이로 바꿔 전달하는 게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사명이며,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착상하여 노력하고 계신 선생님의 작업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이 아주 핵심적인 이야기입니다. 기도생활이란 마치 아이가 '엄마' 하고 부르는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하느님이나 도道는 바로 우리에겐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단순하고, 없는 것처럼 있는 것이 진짜 진리 아니겠습니까. 만트라(주문)처럼 번역하면 상처를 입는 말이 있어서, 저도 제 논문 제목에서 '도'와 '로고스'를 그냥 그대로 썼던 것이죠. 필로칼리아에서도 단순한 기도문을 외우며 그것이 호흡과 일치하도록 지속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지극해지면 인간이 성화되어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지요. 필로칼리아에서는 빛으로 화한 인간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신의 모상인 인간은 변해가는 존재입니다. 얼굴이 달라져 가는 것입니다. 자유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경지는 동서와 남녀가 없는 세계,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21세기는 다원의 시대이며, 이 말은 중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각자가 자기 서있는 발 아래를 깊이 파야 합니다. 그곳에 진리가 있습니다.

 

장시간 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http://www.sungchun.or.kr/files/435/old/jilli/jilli51-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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