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및 교육

장년기 칸트의 실제 모습

leejw162 2025. 5. 14.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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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기 칸트의 실제 모습을 보자.

(본 블로거 왈: 칸트의 미학엔 인간의 생명과 의지가 신의 존재와 함께 도덕적 언어로 끝임없이 있다.)

Immanuel Kant(1724~1804)는 구(舊) 독일 동(東)프러시아 쾨니히스베르크의 탄생이다.인구 5만 정도되는 당시로서는 다소 꽤 큰 도시라고 한다. 황제가 거주하는 프러시아의 수도로 북해의 중심 항구도시이다. 많은 철학은 고대부터 항구도시를 기반으로 출발한다. 이런 점에서 내가 거주하는 부산도 철학의 도시로는 손색이 없다. 그런데 장년기 모습에 혼돈이 있어 진짜 모습을 찾아 탑재한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독일이 이런 걸로 실수하면 곤란하다. 나도 여태 후학자들이 화가를 동원하여 일부러 좋게 윤색한 초상화인줄 알았다. 그런데 보니 Kant를 비판한 자의 사진이란다.
뭘, 어떻게 비판한 건지는 자료가 미비하여 모르겠다. 칸트!!! 키가 159cm정도로 왜소하고 작은 편인데, 당시 그 지역의 성인 남성 평균키가 160 초반이라하니 별로 작은 키는 아니다. 수준 높은 철학저술과 명강으로 영국 옥스포드나 독일의 유수의 대학에서 좋은 조건으로 초빙을 받았으나, 몸이 선천적 선병질로 허약하여 가질 못하다가, 드디어 오랜 15년의 사강사 끝에 45세에 모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철학 정교수를 자리을 얻었다.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있어 저축도 더 하고, 조용하고 좋은 곳으로 이사도 가고, 시중을 한 명 구해 오로지 철학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명저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반, 판단력 비판 등등은 어렵던 말든 귀족이나 신흥계층들이 장식용으로 거실에 사서 거치하는 바람에 당시 독일의 베스트 셀러까지 되었다. 그의 명성이 전 유럽과 러시아 및 미국에 까지 번져 이 항구 도시의 유일한 대학에 그의 철학을 청강하거나 배우려 오는 학생들과 방문하는 저명한 학자들이 줄을 이었다.
유럽 전역에 유명한 철학자가 되다보니 사적으로도 그에 걸맞는 조용한 집이 하나 필요 했다. 이에 드디어 시간이 흘러 15년 후, 60세에 그에 격을 맞추어 격식이 있는 손님을 몇 명 초빙할 만한 정도의 밝고 아늑하면서도 담백한 집으로, 조용한 시내 강가의 2층으로 사는 등 나중엔 대학 총장까지 순번제로 했다. 그는 이집을 상당히 좋아했다. 무엇보다 강가의 시내이면서도 평소엔 적막같이 조용했다. 1층엔 시종이 살림집으로 살고, 2층엔 그가 거주할 거실과 침실로 망중한으로 거의 매일 중식에 그를 찾아오는 명사들과 넓은 테이블에서 둘러 앉아 식사 후에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정보를 교환하였다. 생생한 세상 정보는 철학자로서 매우 필요한 일이다. 명사들은 칸트에게 하나의 최신 정보을 전달하고 나면 자신을 매우 뿌뜻하게 여겼다고 한다. 자신이 바로 칸트 교수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칸트는 그런 이야기에 성심을 다 하면서 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몸이 약한 칸트의 사정을 잘 아는 빈객들이라, 중식 후 4시 전에 다 돌아가고, 그는 4시가 되면 우산을 든 시종과 강아지를 하나를 데리고 강변에 산책을 나갔다. 정확히 4시이면 집을 나서 강변을 한 바퀴돌고 돌아 왔단다. 그리고는 가벼운 독서와 수학문제를 취미 삼아 풀고는 저녁 10시에 취침에 들어 가서 다음날 4시 50분에 시종의 알람으로 기상을 하여 오전(07~09시)에 있을 대학 강의 준비와 강의 후엔 귀가하여 13:00까지 조용히 서재에서 철학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그리곤 오후 1시부터 4시 전까지는 자기를 찾아 온 빈객들과 점심 식사와 담소를 하며, 세상에 대한 정보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차나 커피 타임까지 마무리로 가졌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돈의 중요성을 어릴적 부터 절감하여, 청강수입에만 의존해야 했던 무급의 사강사 시절부터 큰병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매월 20타아르의 돈을 저축해놓고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고 차츰 모아 나갔다. 이와 같은 검소와 절약으로 만년에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평생 모은 재산으로 당시로서는 큰돈인 2만 타르를 장조카에게 사후 유산으로 남겼는데, 이 장조카는 1년 반만에 그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 인류는 이분을 통하여 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식론, 도덕철학, 미학개론을 얻었다. 나도 이에 대화를 할 적에 이분의 미학적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을 하긴 한다. 언어에 있어서 인식과 도덕을 정확하게 구사하면서 미학의 길을 걷는다면, 누구나 아비투스(habitus)가 상당하고 굉장한 도야인이 될 것이다. 특히 언어에 있어서 만큼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조용한 오전의 봄비마냥 겨울을 갓지난 마른 대지에 따뜻하고 영양을 충분히 널리 깊게 우산 속 소리 없이 공급하는 언어의 매력인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야코비 선생이 무얼로 칸트 선생님께 시비를 걸었지???
그리고 쾨니히스베르크는 겨울엔 엄청 춥다고 한다. 지금은 러시아의 별도 영토로 칼라닌그라드가 되었다. 제2차 대전 히틀러 독일군을 압살하기 위한 영국군의 대규모 공중 폭격으로 옛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새 모습의 러시아 풍의 항구도시로 변모했다.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100% 추방되어 작금엔 시민마저 모조리 러시아인들이다. 엄청난 칸트의 철학도 인명이 통째로 왔다갔다하는 살벌한 현실 정치 앞에서는 완전 추풍낙엽이다. 그곳에 홀로 가서 6개월 정도 호텔에 머물면서 오후엔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사색을 하고 왔으면 한다.

장년기 칸트의 실제 모습(그런데 독일이나 한국 등 많은 칸트관련 철학책에서 Jacobi의 모습을 칸트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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